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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유하-흐르는 강물처럼

유하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 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힘만으로 생명의..

&.. 2009.04.16

[Poem] 이형기-호수

이형기 어길 수 없는 약속처럼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나무와 같이 무성하던 청춘이 어느덧 잎지는 이 호숫가에서 호수처럼 눈을 뜨고 밤을 새운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조용히 우러르는 눈이 있을 뿐이다 불고 가는 바람에도 불고 가는 바람같이 떨던 것이 이렇게 잠잠해질 수 있는 신비는 어디서 오는가 참으로 기다림이란 이 차고 슬픈 호수 같은 것을 또 하나 마음속에 지니는 일이다

&.. 2009.04.13

[Poem] 고정희-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 2009.04.08

[Poem] 도종환-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도종환 피었던 꽃이 어느 새 지고 있습니다. 화사하게 하늘을 수놓았던 꽃들이 지난 밤비에 소리없이 떨어져 하얗게 땅을 덮었습니다. 꽃그늘에 붐비던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습니다. 화사한 꽃잎 옆에 몰려 오던 사람들은 제각기 화사한 기억속에 묻혀 돌아가고 아름답던 꽃잎 비에 진 뒤 강가엔 마음없이 부는 바람만 차갑습니다. 아름답던 시절은 짧고 살아가야 할 날들만 길고 멉니다. 꽃 한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올해도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

&.. 2009.04.07

[Poem] 김재진-연어가 돌아올 때

김재진 칠판에 누가 낙서를 해두었습니다. (연어가 돌아오듯 그대가 돌아옵니다. 그대가 돌아오듯 연어가 돌아옵니다.) 창 밖을 내다보던 나는 지우개로 천천히 낙서를 지웁니다. 눈을 감으면 반짝이는 강이 내 안에 흐릅니다. 아무리 지워도 눈부신 강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지워도 눈부신 기억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미루나무 가지 위로 키 큰 하늘이 급류가 쏟아지듯 파랗게 쏟아지고 연어가 돌아오듯 그대가 돌아옵니다. 못 잊을 기억 찾아 연어가 그대가 돌아오듯 돌아오고 있습니다. ------------------------------------------------------------------------ 시간 앞에 모든 것이 변한다지만 누군가 나를 연어처럼 혹은 내가 연어를 기다리듯 아무리 오랜 시간이 ..

&.. 2009.03.30

[Poem] 안상학-겨울 남풍

안상학 내 걸어온 길 사랑 아닌 적 있었던가 겨울 남풍에 실려온 동백꽃 내음을 따라 내 걸어갈 길 사랑 없이 갈 수 있으랴 기차는 기찻길을 밟으며 지나가는데 내 사랑도 없이 사랑의 길 갈 수 있으랴 밤에 쓴 편지를 전해 주는 우체부처럼 한낮의 골목길을 서성이는 사랑이여 기찻길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면 동백 동백 동백꽃 지는 가슴을 남으로 난 기찻길 위에 올려두고 싶었네

&.. 2009.03.28

[Poem] 김석규-강의 변증법

김석규 강물은 강변의 풍경들을 다 데리고 가고 싶은 것일까. 제 키보다도 더 큰 그림자를 유유히 드리우고 섰는 나무며 집이며 강언덕의 작은 풀꽃 하나까지도 어서 가자고 부지런히 따라 오라고 젊은 한 때의 격정으로 물소리 철벅거리며 내달았지만 나무와 집들은 금이 간 물결 위에 제 그림자만 수습할 뿐 언제나 정지된 풍경으로 서 있고 흘러가는 것은 강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았을 때 강변의 풍경 하나 마음 깊은 곳에 퍼담아 두려 해도 바람이 헤살부리고 먹구름이 와 덮어버리고 어떤 날은 안개가 와서 한꺼번에 다 먹어치우고 온 하루 거칠게 몸을 뒤틀며 강짜도 부려 보았지만 그 사이 강물은 또 저만치 아래로 떠내려가서 강언덕 바람에 젖어 바다가 내다보이는 어느덧 하구 먼 상류의 가파르던 발걸음이 무디어지고 성화를 부..

&.. 2009.03.27

[Poem] 곽재구-첫눈 오는 날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 2009.03.25

[Poem] 곽재구-희망을 위하여

곽재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니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 2009.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