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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황동규-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 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 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 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 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 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2009.03.21

산토리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요즘 산토리니에 마음을 온통 뺏기고 있다. 동명의 음악도 있고, 이쁜 풍경들로 워낙 유명한 곳이라서 사진으로도 심심찮게 접하게 되는 곳이지만 특별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었는데...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벽과 지붕, 하늘보다 더 파란 성당의 지붕들, 짙푸른 지중해를 종일토록 바라보다 저녁이 되면 언덕마루에서 마을과 바다를 배경으로 붉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떠올릴 얼굴과 그리워할 석자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들어 부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진다. 지지난주 부산여행 이후로 더더욱... 한 한달쯤 아무 생각없이 낯선 길을 걷고,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스쳐지나는 풍경들을 눈과 가슴에 담을 수 있다면... 오늘은 금요일.. 밤차 타고 어딘가로 다시 떠나볼까?

&.. 2009.03.20

[Poem] 곽재구-소나기

곽재구 저물 무렵 소나기를 만난 사람들은 알지 누군가를 고즈넉이 그리워하며 미루나무 아래 앉아 다리 쉼을 하다가 그 때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 본 사람들은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격정이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것이 얼마나 참기 힘든 분노라는 것을 그 소나기에 가슴을 적신 사람들이라면 알지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는 것이 또한 얼마나 쓸쓸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 2009.03.18

[Poem] 김재진-넉넉한 마음

김재진 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 도는 편안한 곡선하나 가지고 싶다 뾰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닳고 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멩이처럼 둥글고 싶다 지나온 길 모두 돌아보게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 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 날카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 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 2009.03.10

[Poem] 최영미-행복론

최영미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며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

&.. 2009.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