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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기형도-오래된 書籍

기형도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

&.. 2009.03.05

[Poem] 기형도-바람은 그대쪽으로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 한다. 단 하나의 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 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 소리가 그대 短篇의 잠속에서 끼여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 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 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 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 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 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 2009.03.05

[Poem] 기형도-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2009.03.05

[Poem] 기형도-그집 앞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처럼 쏟아졌네 어떤 고함 소리도 내 마음 치지 못했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모든 추억은 쉴 곳을 잃었네 나 그 술집에서 흐느꼈네 그날 마구 취한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있었네 사내들은 남은 힘 붙들고 비틀거렸네 나 못생긴 입술 가졌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벗어둔 외투 곁에서 나 흐느꼈네 어떤 조롱도 무거운 마음 일으키지 못했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 2009.03.05

[Poem] 김석규-사랑에게

김석규 바람으로 지나가는 사랑을 보았네 언덕의 미류나무 잎이 온 몸으로 흔들릴 때 사랑이여 그런 바람이었으면 하네 붙들려고 가까이서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만 떠돌려 하네 젖은 사랑의 잔잔한 물결 마음 바닥까지 다 퍼내어 비우기도 하고 스치는 작은 풀꽃 하나 흔들리게도 하면서 사랑이여 흔적 없는 바람이었으면 하네

&.. 2009.03.04

[Poem] 곽재구-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 2009.03.04

[Poem] 곽재구-다산초당 가는 길

곽재구 친구 장작불이 툭툭 구들을 때리는 해남 윤씨 외가의 한 사랑에서 조금은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네 창을 열면 거기 황건 두른 바다갈대의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강물 먹인 삼베 옷자락 펄럭이는 마을의 아침이 빛나고 지금은 폐선 한 조각 드나듬이 없는 선창의 들목에서 수만 옛사람들의 짓눌린 목소리로 바다오리들이 솟아오르곤 하네 등 뒤에서 누군가의 쓰라린 호곡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더러는 머리채를 잡아 끄는 소리와 칼 씌우는 소리도 살아나고 돌아보면 푸르름 짙은 바다의 수면에는 누군가의 크막한 얼굴 하나 조용히 웃는 것이 보였네 친구 그것은 한 미천한 행려자의 깨달음의 얼굴이었네 성지를 마련하지 못한 역사라고 끝내 우겨온 이 땅에서 살붙이 형제들의 피와 살과 울음이 스며든 땅 어딘들 성지 아닌 ..

&.. 2009.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