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ak/Sorak_Ridge

[설악산] 흑범길, 맹수처럼 사납던.. ①

저산너머. 2010. 9. 1. 22:26

'~~ 조난.....'


흑범길 3단 직벽 등반 완료 후 마지막 왕관봉을 코앞에 둔 지점.
갑자기 종적이 묘연해져버리는 길.

길을 찾아 헤매는 와중 급작스럽게 퍼붓기 시작하는 세찬 폭우.
폭우에 동반한 매서운 칼바람.

피할 틈도 없이.. 서 있기도 힘든, 그 좁고 가파른 암릉위에서 우리는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 채,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젖은 몸속을 파고드는 한기, 사시나무 떨듯 몸이 떨려오면서, 서서히 저체온증이 우려되는 상황으로...

"우르릉~~꽝!!!"
문득,, 머리위에서 귀청을 찢을 듯한 굉음.
이번엔 천둥번개다.
비와 바람과 천둥번개가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는, 그야말로 완벽한 조난을 위한 삼중주.....ㅡㅡ

어디 몸하나 숨길데 없는 암릉 꼭대기.
우리들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쇠붙이 등반 장비들.
낙뢰의 공포가 엄습한다.

우리들에게 닥친 사상 최대의 시련...
이렇게 결국.. 말로만 듣던 그 조난이라는걸 우리도 당하는가보다.




범길..

천화대와 석주길은 수차례 등반했고, 범봉도 올랐지만, 이상하게 인근의 흑범길은 한번도 등반해 본 적이 없다.
등반은 커녕 흑범길을 화두로 대화를 나눈 기억도 거의 없다시피하다.
천화대와 석주길의 유명세로 인해 흑범은 우리들에게 철저히 잊혀진 길이었고, 설악골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오로지
천화대와 범봉, 석주에 집중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흑범길이 등반하기 쉬운 초급 코스로 소개되어 있어 너무 쉬운 상대로 생각했던 탓일까?
그렇다면 이번에 그 댓가를 톡톡히 치른 터...
흑범길이 어떤 길이던가?
우리나라 등반사의 신화와도 같은, 표범 故 송준호에게 헌정된 길이 아니던가...



난히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0년 여름.
예년 같으면 8월말경엔 무더위가 한풀 꺾이기 마련인데, 올핸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내려대는게 비다.
이런 이상스런 기상을 고려해 어프로치와 코스가 짧고, 난이도도 높지 않은 대상지를 찾다 선택한 곳이 바로 흑범길이었다.

산행 출발전, 서울지역엔 여지없이 강한 비가 시도때도 없이 오락가락하고 있고, 그 다음날도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다행히 속초지역엔 오후 한차례 비가 내린다는 예보이다.
물론 기상청 예보야 단순 참고사항일 뿐..
우리의 안전을 담보하기엔 그 신뢰도가 바닥을 친 지 오래전이므로...

날씨영상 들락날락하기 수십 번..
동남아에서 동북아, 멀리 캄차카까지 걸쳐 거대한 띠를 이루며 며칠동안 지겹게 비를 뿌렸던 구름띠는 북진하는 강력한 열대
저압부에 밀려 만주벌판 위로 쫓겨올라갔고, 설악권은 열대저압부의 영향권에서도 살짝 비껴난 듯해 일단 큰비는 없을 것 같았다.
잘만하면 적당히 구름으로 덮혀 덥지도 않고, 더없이 시계가 깨끗하고 청명한, 그야말로 릿지등반에 최적의 날씨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흑범길 등반 중반까지만해도 이런 예상이 어김없이 들어맞는 날씨라서 나름 흐믓한 미소를 지었는데, 결국 -------

열대저압부인지.. 강력한 막판 반격에 우린 진퇴양난의 상황속을 헤매고 있었다.

 

1피치 등반전엔 더없이 맑고, 청명한 날씨였습니다. 우리의 예상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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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골 쌍폭포 직전 좌측의 실폭포 왼쪽 사면길을 따르다 왼쪽 능선길로 오릅니다.
흑범길을 향해 오르던 중 바라본 아침 노을.
색감이 참 독특하고, 예쁘더군요.


염라폭포. 평상시엔 건폭이지만, 길이가 100여미터쯤 되보이는 긴 폭포.

등반 시작 부분에서 올려다본 흑범길 풍경. 좌측 소뿔같은 바위가 참 인상적이더군요.

파란 하늘과 흰구름.. 보고 또 봐도 너무 좋네요.

마등령 오르는 길. 우측의 암봉이 마등령을 오르다보면 능선 상단 쪽으로 거대하게 솟아있는 세존봉입니다.

1피치 출발 직전. 다들 뭐하고 있는 중?



"쨍그렁 쨍그렁~~♬♪"
이른 아침 설악골에 울려퍼지는 소리..
흑범길 첫피치를 눈앞에 두고, 하네스 착용하는...

드디어 등반이 시작된다는 긴장감과 더불어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던 그 소리가 이젠 무언가 멋진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부풀게 하는 전주곡이자 정겨운 음악처럼 들리니...ㅎㅎ
너무 오래간만의 릿지 등반이라서 더 그런 것일까?


"퍽~~!!"
석주길을 오르고 있던 어느 날, 흑범길 쪽에서 문득 들려오던 소리..
상당한 낙차를 두고, 묵직한 무언가가 추락하는 둔탁한..

'어? 이건 분명 추락하는 소리같은데?'

잠시후
"혀~엉! 나 다리 나갔어~~~"

우린 어느 암봉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이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그 팀 선등자의 메아리가 들릴 뿐, 더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흑범길에 대한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기억이었다.

이런 기억 때문일까?
흑범길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추락이라는 단어가 오버랩되곤 했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드디어 본격적으로 등반 시작. 저 소뿔같은 바위 아래 오른쪽의 작은 침니를 통과하면...

1피치 누운 크랙 구간에 도착하게 됩니다.

누운 크랙 구간을 등반 중입니다. 어렵지는 않지만, 우측이 까마득한 벼랑이라서 고도감이 상당한 구간.

흑범길의 상징과도 같은 사각형 형태의 인상적인 암벽. 선등이 등반중인 슬랩은 어렵지 않게 걸어 오를 수 있는 구간입니다.

우리의 No.2가 슬랩을 오르는 중.

멀리 울산바위 앞쪽으로 유선대와 장군봉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달마봉이 시원하게 조망됩니다.

릿지 등반때면 유난히 즐거우신 표정의 짱님.

좌측의 헤이즐럿님이 슬랩을 등반중이시고, 넘버투는 사각형 암벽 우측의 침니를 오르고 있습니다.
침니 위쪽의 사면은 홀드나 스탠스가 좋지 않아 약간 까다로운 구간이더군요.
상당한 고도감과 더불어...


멋진 기둥 바위를 배경으로 짱님과 기성. 사각형 암벽 앞쪽의 슬랩을 오르며 카메라에 담았네요.

등반대장님은 휴식 중.

우리의 No.2는 열심히 근무중.
넘버투는 오늘 유난히 기분이 별로인 듯하네요.
컨디션이 안좋은건지.. 뭔가 불만이 있는건지..
좀 힘들어보이는 듯도 하고...
혹시 대장은 놀고, 자기만 일해서 그런건 아닐까요?ㅎㅎ


대장은 이제 아예 누워서 꿀맛같은 휴식중이네요.

파란 하늘과 구름이 유난히 예쁘더군요.

우측이 엄청난 벼랑이라서 고도감이 상당하고, 오른손의 홀드가 애매한 디에드르 크랙 구간을 헤이즐럿님이 등반 중이십니다.
크랙에 난 잡풀을 뽑으면서 올라오시는 듯..ㅋㅋ


너무도 해맑게 웃고 계시는 짱님.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저까지 다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열심히 등반중이신 성동형님. 역시 크랙의 잡초 제거중인 듯..ㅎㅎ

내내 기분이 안좋아보이던 넘버투 미수기..
참다 참다 드디어..... 빵!! 텨졌나봅니다.
잔뜩 열받은 듯, 정수리에서 피어오르는 저 엄청난 스팀 좀 보셔요.
그야말로 분기탱천.. 화가 하늘까지 뻗쳤습니다.

'대장 지는 편히 앉아서 쉬구... 맨날 나만 힘들게 땡겨줘야되구... 아~~ 힘드러~~ ㅆ6@.@%$#!&'


글타구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구...
넘 안쓰러워보여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줄까 해서는
"넘버투! 나 좀 바바~~" 했더니만..
글찮아두 힘들어 죽것는디,
귀찮게 한다는 듯한 표정.

넘버투 저 머리카락 좀 보셔요~
얼마나 화가 났길래 머리카락 한올한올이 다 뻣뻣하게 서있네요.
넘버투가 오뉴월에 한을 품었으니, 암만 해두 오늘 한따까리 없이 그냥 넘어가긴 힘들 것 같군요.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을 각오해야 될지도... 덜덜덜~~;;
저는 이쯤에서 하산했으면 하는 맘 간절하네요...ㅠ
혹시 나중에 폭우가 내린다거나, 비바람이나 천둥번개가 친다거나 하면 다 넘버투 때문일지도...ㅎ


후미 기성도 열심히 크랙의 잡초를 제거하면서 등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