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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곽재구-다산초당 가는 길

저산너머. 2009. 3. 2. 18:41




곽재구



친구
장작불이 툭툭 구들을 때리는
해남 윤씨 외가의 한 사랑에서
조금은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네
창을 열면 거기 황건 두른 바다갈대의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강물 먹인 삼베 옷자락 펄럭이는 마을의 아침이 빛나고
지금은 폐선 한 조각 드나듬이 없는 선창의 들목에서
수만 옛사람들의 짓눌린 목소리로 바다오리들이 솟아오르곤 하네
등 뒤에서 누군가의 쓰라린 호곡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더러는 머리채를 잡아 끄는 소리와 칼 씌우는 소리도 살아나고
돌아보면 푸르름 짙은 바다의 수면에는
누군가의 크막한 얼굴 하나 조용히 웃는 것이 보였네
친구 그것은 한 미천한 행려자의 깨달음의 얼굴이었네
성지를 마련하지 못한 역사라고 끝내 우겨온 이 땅에서
살붙이 형제들의 피와 살과 울음이 스며든
땅 어딘들 성지 아닌 곳 없으련만
나이 삼십 넘어 이제야 가슴속에 부끄러운 성지 하나 모서면서
아침이면 다시 이 바다와 산과 들에 쏟아지는
햇살의 뭉치를 쳐다보곤 하네

친구
이 깨달음이 오던 첫날에
자네를 이 성지에 초대하고 싶었네
삶과 철학과 노동과 종교의 그 모든 정신이 어수선한 채
뒤죽박죽이 된 서울 땅에서 자네가 하루종일 거푸 쓰러지며
다시 일어서며 종래는 거품과 함께 쓰러지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네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오천년 우리 땅에 내림으로 물려진
스스로의 풍경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네
친구, 그대가 공원이거나 장관이거나 회장이거나 품팔이거나
가수 박사 콜걸 기자 눙꾼 외판원 펨프 수도승 선생이거나
한수 이북에 있거나 한 수 이남에 있거나
사랑이 깊거나 슬픔이 오래거나
몰매를 맞았거나 국사범이 되었거나
그냥 쓰러져 한줌 풀이 되었거나
바람 실하고 하늘 푸르른 날
꼭 한 차례 이 성지에 다녀가기 바라네
여기 간단한 이정표와 차편을 함께 적네

우리들이 오백년 우리 근세사의
꽃이라고 밀어 온 서울에서
광주까지는 320km 주행시간 4시간 30
비교적 실한 4차선 고속도로를
두 시간 남짓 달리면 한밭벌에 이르게 되네
여기서부터 호남선은 시작된다네
밀려오는 2차선의 차창을 통해
그대는 선청성 소아마비를 닮은 것만 같은
우리 국토의 한쪽 모습과 마주치게 될 것이네
남한 30%의 땅과 30%의 인구를 지나고
3%
도 안 되는 돈과 3%도 못 되는 공장을 지닌
그러나 100%의 사랑과 100%의 추억을 몽땅 간직한
이 땅을 달리면서 진실로 그대가
상념에 잠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땅의 흙과 그 향기이네
저토록 살진 바람과 풀과 강과 하늘을
저토록 오래 아름답게 길러 온
그리하여 우리들의 깊은 슬픔과 한까지를 녹여 주는
이 부드럽고 촉촉한 흙 앞에서
그대는 그대에게 닥쳐 올 100%
사랑과 빛나는 미래를 꿈꾸어도 좋을 것이네

버스는 우리들의 쓰라린
젊은 한때를 불태웠던 논산을 지나
그 옛날 이 성지를 찾아가던 카랑한 눈빛의
한 목민관이 객주잠을 청하던 여산을 지나
녹두꽃이 피는 삼례읍 지나
콩나물 비빔밥을 지나
장성 갈재를 넘게 되네
여기가 한때는 영랑이 붉어진 마음으로
'
오메 단풍 들 것당께'라고 노래했던
지금은 하와이 혹은 따블백이라 흔히 블려지는
본격적인 개땅쇠의 땅이네
버스는 이제 빛고을 광주에 닿게 될 것이네
그대는 우선 지나가는 아무에게나
금남로로 가는 길을 물어 한동안 이 길을 걸어도 좋네
이 길은 정면으로 보이는 무등의 모습과 함께
스스로 이 땅의 사랑과 희망의 거름이라 믿어 온
이곳 빛고을 사람들이 그들의 목숨과 함께 닦아 온
사랑하는 오월의 길이라네
그때 그대는 이 길 위에서
몇 분의 기도와 묵념과 한국 근세사의
한 뜨거운 상념의 시간을 지녀도 좋을 것이네
그리고 다시 눈을 들어 길 정면의 무등을 바라보면
지금은 늙어 버린 한 시시한 북도 사내가
갈메빛 등성이라고 얘기했듯이
여름녘엔 칡넝쿨과 돌기둥이 지어미 지아비의
사랑 모습으로 얽혀진 상봉을 볼 것이며
겨울이면 그 이마을 하얗게 덮고 있는
예지와도 같은 적설을 볼 것이네

광주에서 강진까지는 50km
주행시간 1시간 20

버스는 지은 금성사가 된
옛 나주목 율정 삼거리를 지나
월출산을 스쳐 강진에 이르게 되네
이때 그대가 눈여겨 볼 것이 있다던
그것은 이 땅이 끝내 버림받은 오지가 아닌
축복받은 땅이라는 가능성의 발견이 될 것이네
배꽃이 피고 복숭아꽃이 하늘 가득 흘날 리는
과수밭 구릉지대를 지나면서
봄날, 그대는 그대의 가슴 깊숙이
복사꽃 능금꽃이 피던 내 고향 하고
노래 부르던 옛 시절이 생각날 것이며
멀리서 은빛으로 시행하는 영산강의
살아 끔틀거리는 모습과 함께
점점 벅차오르는 그대의 가슴을 느낄 것이네
그리고 가을날, 이땅의 슬픔보다 더 많은
과수나무들이 색색으로 단풍이 들 것이며
신문 봉지를 벗긴 배들이 가을 햇살아래
배꼽을 드러내놓고 부끄럽게 익어가는 모습이 보일 것이며
그리하여 그대는 그대의 슬픔과
사랑의 추억마저 잊고 가슴 풋풋이 고여오는
향기로운 이 땅의 흙내음을 느낄 것이네

친구
이제 우리는
우리 여행의 절정에 접어 들었네
강진에서 도암만 만덕리 귤동부락까지는
12km
주행시간 30
사초리 가는 완행버스에 오르면 될 것이네
배차 시간은 한나절에 두 대
좌석과 입석과 급행과 콜택시와
온갖 차량의 물결 속에 살아온 그대에게
이 완행버스는 옛 가마를 타고 가는
포근한 정을 느끼게 할 것이네
그리고 이 시골 버스에도 조용필의
아시아는 한 형제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노래 가락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차창 왼편으로 장검처럼
남해를 비집고 올라온 도암만의 풍경이 보일 것이네
한 가지, 날짜를 잡을 경우에는
4
일과 9일을 택하면 더 좋을 것이네
이 날들은 강진 닷새장으로
인근 칠량 미량의 장꾼까지 큰 장을 보기 위해 모여 들고
이 장꾼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대는 그대의 순박한 모국어와
명태 두어 마리 담긴 짐보따리와
소값과 상치값이 떨어져 자살한
이웃 마을 농꾼 이야기도 함께 들을 것이네
운수가 대통한 날이면 선반 위에 올려 놓은
할머니의 봇짐 속에 든 씨암탉 한 마리가
꽁지를 비집고 꼬끼요 노란 달걀 하나를
그대의 머리 위에 툭 터쳐 줄 것이며
이것은 이 성지를 찾아온 행려객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가장 따뜻한 축포가 될 것이네
그리고 잘 걸으면 두 시간 남짓한 이 거리를
가능한 도보로 걸어 죽었으면 하는 마음 함께 적네

사랑하는 친구여
이제 우리는 우리 이정표의
마지막 뿌리인 목적지에 닿았네
빛나는 기념관도 화려한 동상도
값비싼 정원수도 잘 가꿔진 잔디밭도
그 아무것도 없는 그대의 목적지에 이르러
조금은 실망이 클지도 모르겠네
그러나 모든 것은 또한 그대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네
지금부터 170년 전의 한 이조 사내가
이곳에 남긴 순결한 흔적들에 대해서는
우리들의 사울 셋방에서 다시 얘기하도록 하세
여기가 바로 초당입구이네
나는 여기서 그만 돌아가겠네
친구 혼자만의 시간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네
앞으로도 우리는 더 많은 형제인
들과 산과 바람과 강을 마주치게 될 것이네
그렇다네 슬픔도 사랑과 희망도 분노도 또한 우리의 형제이며
우리가 그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눈길을 주고받는
그 순간에 성지는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마련되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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