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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저산너머. 2008. 7. 26. 10:23

요즘이야 장마철을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상이변이 일상화되었지만, 내가 어릴적엔 장마철이 비교적
일정한 편이었고, 지루한 장마가 끝나는 즈음이면 밭두렁엔 옥수수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나는 어릴적부터 옥수수의 구수하고, 달짝지근한 맛을 유난히도 좋아했다.


외할머니 생신이 돌아오는 이맘때쯤이면 어머니는 일년중 거의 유일하게 친정에 가시는데, 그때마다 나를
데리고 가셨다.
내 고향은 전형적인 시골 마을.
당시 사회 분위기가 대개 그러했듯, 우리집에도 고부간의 갈등이 꽤 있는 편이었다.
갈등이라고 하기엔 항상 어머니가 일방적으로 당하시는 쪽이었지만..ㅎ


할머니께서는 어머니에게 친정에 가지 말라고 대놓고 말씀하시진 않아도, 어머니가 친정에 가는 걸 내심
몹시 싫어하셔서 괜히 엉뚱한 일을 핑계로 싫은 소리를 하시기 일쑤이셨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외할머니 생신에 가시려고 참으시며, 눈물을 훔치는 일이 많아져서 이맘때가 되면 집안 분위기가 좀 그랬다.

그런 갈등은 나중에 할머니가 연세가 더 드시면서 그 대쪽같던 성격이 많이 유해지시고, 그 사이에 외할머니도
돌아가시면서 결국은 자연스레 사라져버렸지만......


두 분의 사이야 어떻든 어린 나로선 외가집에 가는걸 너무 좋아해서 여름이 시작되면 빨리 옥수수가 익고,
장마가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내가 외가집 가는걸 좋아했던 이유는 기차를 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냇가에서 외사촌들과의 물놀이 때문..

고향 마을은 꽤 외진 촌동네인 탓에 내겐 외가집 가는 때가 거의 유일하게 차를 탈 수 있는 기회였다.
기차 좌석에 앉아서 듣는, 기차 바퀴의 덜컹덜컹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울림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또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면서 순간순간 바뀌는 차창밖 풍경들, 가끔씩 판매원 아저씨가 음료수와 계란 등을
팔러 객차 사이를 오가는 모습은 어린 내 눈엔 꽤나 신기하게 보였다.


변변한 계곡하나 없는 산 아랫동네인 내 고향마을과는 달리, 외가집은 산좋고 물좋기로 유명한 충북 제천이라서
넓은 냇가가 있었고, 난 그곳에서 매일 물놀이도 하고, 물고기도 잡으며 놀 수 있는 외사촌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제천이 강원도에 인접한 고장이라서 그런지 그곳의 옥수수 품종은 강원도 강냉이였는데, 어머니는 그 옥수수
종자를 우리 고향 마을에 가져오셔서 심으셨다.
당시 우리 동네의 옥수수는 자루도 작고, 씨알도 시원찮은데다, 맛도 떨어지는 재래종이라서 우리 동네 옥수수는
금새 강원도 강냉이로 대체되었다.
난 찰지고 구수한 그 강원도 강냉이 옥수수가 그렇게도 좋았다.


장맛비 떨어지는 단조로운 음율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빗소리는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하나둘씩 불러들인다.


어느덧 속절없이 불혹에 접어든 내가 여전히 옥수수를 좋아하는건 옥수수에 덤으로 딸려오는 어린시절의 아련한
추억들 때문은 아닐까?



오늘 시골에서 옥수수 한박스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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