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rak/Sorak_Ridge

[설악이야기] 칠형제봉,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저산너머. 2009. 8. 4. 19:17

지지난 주 칠형제봉을 다녀오고나서 문득 생각이 떠올라 글을 남겨본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제목을 붙이긴 했지만, 대단한 사건도 아니고,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일 뿐이다.

 
5~6년전 설악에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던 10월 중순쯤의 일이다.
당시 열정적으로 다니던 산악회가 있었는데, 그 산악회에서 1박 2일로 외설악 칠형제봉을 가게 되었다.
릿지전문 산악회는 아니었기에, 칠형제 암봉 대부분을 우회하는 산행...

산악회 버스로 미시령을 넘어 설악동으로 향하는데, 단풍시즌이 한창이라서 그런지 목우재를 넘기 이전부터
교통체증이 극심해 할 수 없이 목우재에서 하차해 설악동까지 걸어갔다.
체증은 등산로에서도 마찬가지..
설악동에서 비선대를 거쳐 양폭까지도 등산로를 가득메운 행락객들로 인해 예정시간보다 한참 지체되었고,
결국 시간관계상 칠형제봉은 포기하고 양폭 대피소 뒷쪽 능선을 오르기로 했다.

계곡을 타고 오르다 오른쪽 사면으로 빼질빼질 땀을 흘리면서 능선에 오르고 나니, 역광의 칠형제봉 실루엣이
한눈에 바라다보였다. 가끔 카렌다에 등장할 정도로 칠형제봉에 직접 오르지 못한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해줄
만큼 멋진 풍경..
 
능선을 따라 좀더 올라 주변 조망을 감상한 뒤 하산을 시작했다.
뉘엇뉘엇 해가 지고, 천불동 계곡엔 서서히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하는 시각.

앞쪽에서 문득 무언가 "쿵!"하고 무너져내리는 소리와 동시에 "으악!"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놀라 내려가보니 회원 한분이 바위에 깔려 누운 채 꼼짝 못하고 있었고, 산악회 대장님도 다리가
바위에 깔린 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부상자가 능선의 바위를 내려서던 중 불안정하게 걸쳐있던 바위가
밀려떨어지면서 바위를 그대로 안고 떨어지게 된 듯..
그 회원분은 그 즈음 산행에서 여러차례 만나 친분이 있던, 연세 지긋하신 회원분이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여러 회원들이 달라붙어 성인남자 2~3배쯤 됨직한 넓적 바위를 밀어내고 나니 바위에
깔린 분은 상당히 심각한 부상 같아 보였고, 대장님은 다행히 발가락 쪽에 비교적 경미한 부상 정도로 보였다. 

부상이 워낙 심각해보이는데 양폭대피소까지 환자를 무사히 옮길 만한 장비가 마땅치 않아 양폭 대피소에
SOS를 요청했다.
이미 사방이 깜깜해진 시각.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대피소 사람이 환자를 옮길만한 장비를 메고 올라왔다.
부상자를 운반구에 옮기고, 어둠속에 랜턴을 비추며 부상부위에 충격이 최소화 되도록 조심조심 천천히
부상자를 메고 양폭대피소까지 내려왔다.

양폭대피소에서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밤새 환자의 끙끙대는 신음소리 때문에 걱정이 되서 잠은 자는 둥 마는 둥...

다음날 아침 환자의 상태를 살펴보니 조금은 호전된 듯.. 산악회 회원들은 산행 일정대로 망경대와 화채를
거쳐 둔전골로 넘어갔다. 나는 망경대에만 잠깐 오른뒤 양폭으로 되돌아내려와 환자를 돌보다 적당한 시간에
천불동을 따라 설악동으로 하산하기로 했고, 대장님은 화채쪽으로 더 진행해 회원들을 가이드한 후 중간에
양폭으로 하산해 나를 이어 환자를 돌보기로 했다.

오전내내 양폭에서 환자를 돌보다 환자 상태도 그만한 듯하고, 너무 무료해 대피소 매점으로 가보니 오전 이른
시간부터 끝도없이 밀려드는 등산객들로 인해 손이 모자란 상황.
뭐 도와줄거 없냐고 물어보니, 감자 좀 까줬으면 좋겠다고 한다.
대피소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감자전에 막걸리 몇잔 얻어 마시고, 두어시간내내 손가락에 쥐가
나도록 참 열심히 감자를 까댔다.

다음날 출근 때문에 난 점심 이전엔 양폭대피소를 출발해야 했다.
대장님이 다른 산악회에 연락해놓아 그 산악회 버스를 타고 귀경하기로...
그런데 대장님이 아직 능선에서 내려오기 전이라서 홀로 남겨질 환자 걱정에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다보니 
예정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서야 하산을 시작하게 되었다.
천불동 등산로는 단풍 행락객들로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군데군데 정체가 극심한 상황..
천불동 샛길이란 샛길은 죄다 이용하고, 샛길이 없는 곳에선 계곡을 타고 뛰어내려오며 하산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뛰다시피했다.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된 채 설악동에 도착하니 설악동 진입로는 차들로 꽉막혀있어 다시 C지구까지 걸어
내려가야했다.
몸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어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심정.
매표소에서 C지구까지 그렇게 먼 곳인지 처음 알았다.
결국 버스를 이용하기로 한 산악회 대장에 휴대폰을 해 10여분 정도만 기다려달라고 양해를 구한 뒤 간신히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날이었던가 그 다음날이었던가 양폭 대피소에 헬기가 떴다고 한다.
환자분은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 쪽에 손상을 주어 조금만 더 늦었어도 위험한 지경에 이를 뻔한 상태였다고...
그 며칠후에 회원분들과 함께 혜화동 서울대병원으로 그분을 문병갔다.

그 환자분은 가족사가 평범하지 않았던지 인간극장인가 하는 프로에 나오신 적도 있다고 한다.
난 뒤늦게 알게 되어 거의 못봤지만...


당시의 사고를 생각하면 지금도 산앞에 항상 조심하고 겸손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비정규 등산로나, 릿지 등반을 하게 되는 경우엔 더더욱...


이미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 기억조차 희미해져가지만, 이상하게도 사고현장에서 바위에 깔려 반쯤 부러진
채 홀로 서있던 환자분의 레키스틱 하나만은 아직도 내눈에 또렷한 듯하다.
그 레키 스틱---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을까?





칠형제봉 상단에서 바라본 범봉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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