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두타·제주-한라

[동강 트레킹5] 쌍쥐바위~장성산~잣봉~어라연~거운리

저산너머. 2010. 12. 31. 13:37

쌍쥐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환상적인 파노라마. 와이드한 풍경이라서 광각렌즈가 필수인 곳. 표준계열의 렌즈로는 한 화면에 담을 수 없다.





♣ 트레킹 넷째날
 
 점재 마을 ~ 백운산 ~ 칠족령 ~ 제장 마을(1박) ~
 소사 마을 ~ 연포 마을 ~ 칠족령 ~ 문희 마을(2박) ~
 마하리 마하교 입구 ~ 문산리 ~ 쌍쥐바위 전망대(3박) ~ 
 장성산 ~ 잣봉 ~ 어라연 ~ 거운리




강 트레킹 마지막 날.
오늘은 동강의 핵심 비경인 어라연과 새로운 조망 포인트로 떠오르고 있는 쌍쥐바위 전망대를 둘러보는
트레킹 마지막 날이라서 하늘이 맑고 청명하길 바랬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금방이라도 진눈깨비가
쏟아질 듯 잔뜩 찌푸린 날씨이다.
돌이켜보니 신기하게 트레킹 첫날부터 하루는 맑고, 하루는 궂은 날씨가 4일째 반복되고 있다.

장성산~잣봉 등산로는 원래 잣봉, 정성산으로 나뉘어 독립적으로 산행이 이루어지던 곳인데, 올해초
영월군에서 장성산에서 잣봉 사이의 등산로 정비를 마치면서 두 산을 연계한 코스가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장성산 쌍쥐바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원한 파노라마와 동강 최고 비경인 잣봉 어라연의 조망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환상적인 코스이다.


간밤을 쌍쥐바위 전망대에서 보냈다.
한파가 많이 풀린데다 바닥이 목조데크라서 그런지 새벽에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 다른 날보다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새벽에 혹시 등산객이 올라오지 않을까 했는데, 늦은 시각까지 단 한명도 없었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텐트를 정리하고, 배낭을 패킹해 멋진 조망과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준 쌍쥐바위
전망대를 출발한다.



쌍쥐바위 전망대. 2인용 텐트 2동을 세로로 칠 수 있을 정도의 넓이이다.

1시간 정도의 산행으로 이런 기막힌 조망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쌍쥐바위라는 이름은 문산리에서 바라볼 때 쌍쥐바위 전망대 바로 아래에 쥐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형상의 바위와 문산나루 쪽으로 머리를 향한 채 동강의 물을 마시는 또 다른 쥐 한마리의 형상이 있어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멋진 곳을 왜 이제서야 오게 된 것일까?ㅎㅎ
화창한 날이라면 더 바랄게 없었을텐데, 어두컴컴한 하늘이 너무 아쉽다.


전망대에서 장성산으로 향하는 길. 장성산 정상은 전위봉 뒤에 숨어있어 보이지 않는다.

문산교에서 상류쪽으로 이어지는 전망 좋은 절벽길~걷기 좋은 경운기길이 희미하게 보이고, 진탄 마을,
마하리 합수점도 위치가 가늠된다.
조망이 너무 좋으니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던 쌍쥐바위 전망대.


정상 직전의 봉우리에서 휴식을 취하며...
등산로는 쌍쥐바위 전망대에서 날카로운 능선길이 잠깐 나타나다가 전위봉의 가파른 사면을 거슬러
올라야하는 길이다.
노송 가지 사이로 장성산 정상이 보인다. 


전위봉을 내려서는 길가에 보이는 깊은 수직 동굴.
추락 위험 표지판이 걸려있는데, 저곳도 혹시 석회 동굴이 아닐까?


장성산 정상. 정상부는 펑퍼짐하고, 고만고만한 서너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장성산 정상에서 바라본 거운리쪽 조망. 숲 사이로 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작은 마차에서 큰 마차 마을로 넘어가는 마차 고개.
장성산 정상에서 200여m에 위치한, 장성산 정상부를 성벽처럼 두르고 있는 바위지대에 설치된 목조 
계단을 내려오면 걷기 편한 적송군락이 나타나고, 길이 한차례 크게 왼쪽으로 꺾인 뒤, 내리막길이 
마차 고개까지 이어진다.

마차 고개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7~8명쯤으로 보이는 등산객 한팀이 잣봉에서 내려온다.
트레킹 4일동안 트레킹 루트상에서 만난 최초이자 최후인 분들.
서로 행선지를 묻다 백운산부터 동강을 따라 트레킹하고 있다고하니 모두들 놀라운 표정을 지으시며
이구동성으로 이 추운 겨울에 혼자서 대단하다고 말씀하신다.
지긋한 연세의 인상 좋으신 노인 한분은 일행들이 모두 출발한 후에도 한참동안 떠나실줄 모르고 말
한마디 없이 환한 미소로 내 얼굴을 쳐다보신다.
쑥스러워 오그라드는 줄 알았단.....ㅎㅎㅎ

마차고개에서 잣봉 정상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오르막이 400m 가량 이어진다.
잣봉 정상을 그대로 통과해 마차 마을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상의 어라연 전망대를 향해 내려갔다.
전망대 두곳을 둘러본 뒤 마차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다시 잣봉 정상으로 되돌아와 어라연으로
내려가 다시 강변길을 걸어갈 예정이다.


잣봉 정상에서 150여미터쯤 내려오면 나타나는 첫번째 조망터.
아래쪽의 나무 데크 전망대보다 이곳의 조망이 더 시원한 편이다.

잣봉 정상부터 들리던 폭포수 쏟아지듯하는 강물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
아마도 된꼬까리 여울의 짓이리라.
얼마나 많은 뗏꾼의 목숨과 뗏목을 집어 삼킨 곳이기에 이 높은 곳에서도 그렇게 세차게 들리는건지...


 
 
 첫번째 전망대에서 200여m 아래에 위치한 반원형의 나무데크 전망대.  나무 데크 전망대에 설치된 어라연 안내판.



전망대에서 바라본 어라연.
소나무 가지가 하단부의 조망을 가리고 있다.
애써 설치한 전망대인데, 간벌하는 셈치고 소나무 한두그루 베어내고, 가지치기 약간만 해도 훨씬 더
시원한 조망을 감상할 수 있을텐데...


첫번째 전망대로 다시 되돌아와 바라본 삼선암과 어라연.
상단부 시커먼 먹빛 연못같은 부분이 어라연이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바위섬군이 삼선암이다.
삼선암과 모래톱이 하얗게 눈에 덮여 그야말로 선경이 따로 없다.
빛이 좋은 날이었다면 물빛이 정말 환상적이었을텐데.....






 
 
전망대 두곳을 둘러본 뒤 다시 잣봉 정상으로 올라왔다. 어라연으로 길게 튀어나온 능선. 중간쯤에 어라연 전망대가 있다.


어라연 전망대에서 바라본 상류쪽 풍경.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극히 고요한 태고의 공간감마저 느껴지는 곳이다.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으로 이루어진 삼선암.  어라연. 강물이 한바퀴 굽이쳐 휘돌면서 깊은 소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수면에 비친 반영까지 어울려 미사일이나 60mm 박격포탄같은 형상이다.

혹시 유사시에 대비해 숨겨놓은 비장의 무기가 아닐까?
이런 깊숙한 오지에 무슨 미사일이고.. ㄱㅐ뼉다구 같은 소리냐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 숨겨둔다는 게 바로 역발상의 노림수.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서울 북악산 아래 파란지붕집 주인이 파란색 버튼을 누르면 수십년동안 굳게 닫혀졌던 철문이 "끼이익~ " 금속성
파열음을 내며 열린 후, 저 미사일 전면의 거치대가 65도의 각도로 서서히 일어서고, 다시 빨간색 버튼을 누르면
거대한 미사일이 고막을 찢을듯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미리 입력된 좌표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모든게 끝 ------------------

시절이 하수상하니 별 ㄱㅐ뼉다구 풀뜯어먹는 소릴 다.....ㅋㅋㅋ


근데 아무리 봐도 미사일 맞는것 같다.ㅎㅎㅎ






산 중턱에 농가 한 채가 있는데, 이 곳 뱃사공의 집이라고 한다.
이 농가로 오르는 길이 강변길 등로와 하산로 방향 양편에 있다.


저 아래쪽 호수같은 부분이 끝나는 곳부터 된꼬까리 여울이 시작된다.
지나가는 모든 것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집어 삼키겠다는 듯 멀리서도 폭포수처럼 들리는 세찬 물소리가
위압적이다.
된꼬까리 여울은 문희 마을 부근의 황새여울과 더불어 수많은 뗏꾼들의 목숨을 앗아간, 뗏꾼들에겐 악명높은
여울이었다고 한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를 지어 놓았네.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놓게.


오죽했으면 정선 아리랑에 이런 구절이 등장했을까.....

된꼬까리 여울을 지나면서 하루종일 찌푸려있던 하늘에서 드디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거운까지는 갈 길이 아직도 멀기만한데...
이 넘의 된꼬까리가 물길로 사람을 잡을 수 없으니, 비라도 뿌려 훼방을 놓아야 직성이 풀리겠다는건지.....ㅡㅡ


된꼬까리 여울을 지나 만지 나루로 향하는 길.
산중턱의 뱃사공집까지 이런 비포장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뗏꾼들을 상대로 동강변 마을마다 번성했던 수많은 객주들 중 가장 유명했던 전산옥 주막 터.
팔당댐이 생기고, 산업화, 교통의 발달로 동강에 뗏목이 사라지면서 전산옥의 영화도 막을 내리게 되었을 터...


어라연 상회.
이런 비슷한 분위기의 건물이 두어채 더 있다.




어라연에서 만지까지는 꽤 먼 거리..
만지의 드넓은 강가를 걸을땐 약간 지루한 감이 들기도 했다.
이미 꽤 늦은 시각인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씨라서 일찌감치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만지는 오래전 취소된 동강댐 건설 예정지였다.
원래도 강폭이 너른 곳이기도 하지만, 만지라는 이름은 동강댐을 예견했던 이름은 아닌지...
예견된 이름이었다면 그야말로 한바탕 화려한 꿈이었으리라...

만지를 크게 휘도는 강변을 지나 산허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오르다 마차 마을 등산로 갈림길을 지나고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운 거운리까지의 숲길을 내려왔다.
이제 완연히 어두운 밤이다.


동강 탐방 안내소를 지나 버스 정류소에서 차를 기다린다.
막차까지는 아직 한참이 남은 시각.
그런데, 도대체 인적이라곤 없는 동네이다.
차량이 아주 가끔씩 지나갈 뿐, 주변에 가게 하나 없고, 래프팅 성수기에만 거주하는지 둘에 하나는 불꺼진 
집들이고...

한참을 버스 정류소에서 서있는데, 어떤 어르신 한분이 내려오시길래 막차는 떠났는지, 근처에 가게는 없는지
물으니 우리집이 바로 가게이니 필요한거 있으면 따라오라고 하신다. 
딱히 무얼 산다기보다 따뜻한 캔커피나 캔맥주 한잔 정도 하고 싶었는데...

어르신을 따라가니 허름한 집이다.
민박과 겸해 민박 손님이나 동네 손님에게 파는 듯한 가게라고 하기에도 뭐한 작은 규모..
 
마땅히 살만한게 보이지 않아 혹시 라면 끓여주실 수 있는지 물으니 끓여주시겠단다.
어르신을 따라 따뜻한 안방으로 들어가니 참 인자하고, 표정이 온화해 보이시는 할머니도 계신다.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하셔서 안에서만 거동하신다고...

신김치와 반찬, 남은 밥까지 내주시는데, 라면과 함께 먹는 총각김치가 왜 그리 맛있던지...
몇일만에 먹는 밥은 꿀맛이 따로 없고...ㅎㅎㅎ

한참 이런 저런 얘기하는데 할아버지가 내 카메라 가방 보고 그러시는건지 사진 작가냐고 물으신다.
그냥 취미로 찍을 뿐 잘 찍지도 못한다고 하니 사진작가들이 가끔 와서 사진 찍어간다고 하신다.
무슨 말씀인지 궁금해있는데, 벽에 걸린 기사(아래 기사)를 보여주시며 기사속의 인물이 자신이라고 자랑하듯
얘기하신다.


 
홍원도 할아버지 안방에 걸린 강원 도민일보의 기사. 홍원도 할아버지.




[9988 시니어] 물길질 60여년 동강 지킴이

영월 동강 마지막 떼꾼 홍원도 옹
2010년 07월 23일 (금) 정태욱

   
“우리 서방님은 떼를 타고 가셨는데/황새여울 된꼬까리 무사히 지나 가셨나

황새여울 된꼬까리 다 지났으니/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놓게”

영월 동강의 마지막 떼꾼 홍원도(77·영월읍 거운리)옹이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들이킨 뒤 구수하게 들려준 동강아라리 한 소절이다. 떼꾼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동강 된꼬까리 여울을 지나 만지나루에는 지난 1960년대 중반까지 강물에 목숨을 내건 떼꾼들을 상대로 들병장수 전산옥(全山玉)이라는 사람이 기생들을 데리고 주막거리를 차린 뒤 목숨을 부지한 뗏군들에게 술과 웃음을 팔았다. 당시 전산옥은 자그마한 키에 용모가 뛰어나고 아라리 소리를 잘 해 동강유역 떼꾼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홍 옹은 열아홉살에 떼밭(뗏목)에 처음 발을 디뎌 스물여섯인 1959년까지 떼꾼으로 일했다. 집에서 남의 밭을 얻어 담배 등의 농사를 지었지만 어려운 생활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떼돈을 벌기 위해 뗏목을 타는 떼꾼이 됐다. 처음 2년간은 동강 상류 정선에서 내려오는 뗏목을 인계받아 영월과 충북 단양군 경계까지 보내는 초보 떼꾼 역할을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서울 노량진이나 마포나루까지 가는 떼꾼이 됐다. 동강과 남한강의 험한 1200리 물길과 사투를 벌이며 한번 다녀오면 품삯으로 소 한마리 값은 너끈히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물이 풀리는 3~4월쯤 정선 벌목장 인근 동강변에서 영월읍 덕포나루터에 이르는 뗏목은 강폭이 좁고 물도 많지 않아 길이 30m, 폭 3m 50∼4m 규모의 한바닥 뗏목을 세바닥으로 연결해 목재를 운반했다. 덕포나루터에서는 다시 길이 40m, 폭 5∼5m 50한바닥의 뗏목 세바닥을 엮어 길이만 해도 100여m가 넘는 장광을 연출하며 서울로 향했다. 물이 많을 때는 7~10일,물이 적을 때는 25~30일까지도 걸렸다. 뗏목의 앞뒤에는 노의 구실을 하는 그래를 매달았는데, 2인 1조일 때는 물길에 익숙한 경험자나 담이 센 사람이 앞을 맡았고 초보자가 뒤를 맡았다.

그러나 60년대 중반 팔당댐이 착공돼 물길이 끊기고 열차 운행이 일반화되면서 서울로 가는 뗏목은 점차 자취를 감추었다. 당시 대부분의 떼꾼들이 물길의 고단함과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술판이나 노름판 유혹에 넘어가 이래 저래 떼돈을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됐지만 홍옹은 한눈을 팔지 않고 알뜰하게 돈을 모았다. 군대 시절 결혼한 부인 김영자(72)씨와 부부 금실도 좋아 떼꾼 생활을 마치고 농사와 노동으로 7남매를 낳아 잘 키웠으며 장남 홍성래(52)씨는 현재 평창교육청 지원과장으로 근무중이다.

홍옹의 청년 시절 떼꾼 경험은 1997년에 유감없이 발휘됐다. 영월군이 이 해부터 2001년까지 동강뗏목축제를 개최하면서 홍옹의 전통 뗏목 제작과 시연은 당연히 관광객은 물론 사진작가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으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또 이 때부터 2000년까지 동강댐 건설 논란이 불거지면서 전국적인 이슈로 부각되자 동강보존본부 회원으로 강물처럼 밀려드는 동강 탐방객들에게 동강의 아름다움과 지켜야 할 가치를 비롯해 뗏목 이야기와 동강아라리를 널리 알려주는 동강지킴이 역할도 맡았다. 오는 30일 열리는 2010 동강축제에서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관광객 대상 뗏목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예정이다.

현재 영월읍 거운리 동강변에서 민박과 낚시·래프팅 알선 등을 하는 강변상회를 운영중인 홍옹은 “떼꾼들의 구성진 아라리 대신 래프트들의 고함소리만 가득한 동강”이라며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우리의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영월/정태욱

<강원도민일보>




기사 내용을 읽어내려가면서 너무나 놀라웠다.
이런 기분.. 뭐라고 표현해야할까?

문희에서부터 황새여울을 비롯한 무수한 여울들을 지나고, 어라연의 된꼬까리 여울과 전산옥을 거치던 내내
뗏꾼들의 삶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 한켠을 사로잡은 채 떠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바로 그 뗏꾼--- 그것도
이땅의 마지막 뗏꾼이라는 분을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어르신과 기사속 사연에 관해 대화가 오가고, 동강댐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다.
동강댐 반대 시위때는 서울로 가서 뗏목을 엮기도 했다고 하신다.

지난 시절을 회상하듯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어느새 뗏꾼 시절의 추억들이 그득히 담긴 표정이다.
마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계신 듯한...
좀더 오랫동안 자세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아... 막차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미리 좀 알았다면 좋았을텐데....
다음에 오면 꼭 다시 들르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그 자리에서 사진 한장 찍은 후 인사를 드리고는 진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할아버지댁을 나섰다.


맥주캔을 기울이며 문산리발 영월행 마지막 시내버스를 기다린다.
막차가 곧 도착하고, 승객이라고는 오직 나 하나뿐인 영월행 막차는 짙은 어둠속의 동강변 구비구비 강변길을
시원하게 내달린다.

차창 너머로 검은 동강을 바라보는 내 귀엔 자꾸만 정선 아리랑이 맴도는 듯하다.
관심있게 들어본 적 없어 가락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아라리가... 
황새와 된꼬까리의 거친 물살과 사투를 벌이는, 강변 객주집 탁주 한사발로 지친 몸과 시름을 달래는, 뗏꾼들의 
정한이 가득 배어있을 그 탁배기같은 목소리가 말이다..........








< 끝 >